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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 노래 콘서트 나이 사내 테스형 공연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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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

羅勳兒

나훈아가수

 

본명

최홍기 (崔弘基, Choi Hong Ki)

 

출생

1947(?) 211(74)

1950(?) 211(71)

경상남도 부산시 초량동 415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중로 66

 

국적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본관

경주 최씨

신체

175cm, 71kg, B

 

가족

슬하 11, 사촌동생 나진기

 

학력

부산 초량국민학교 (졸업)

부산 대동중학교 (졸업)

서라벌예술고등학교 (졸업)

 

직업

가수

 

병역

대한민국 공군기 공군 병장 만기전역 (231)

 

데뷔

1968년 노래 "내 사랑"

 

대한민국의 가수로 자타공인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으로서 라이벌인 남진과 함께 한 시대를 양분했던 슈퍼스타이다. 트로트 보컬로 주로 유명세를 탔지만, 수많은 히트곡을 직접 작곡해서 히트시킨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한데, 히트곡만 무려 120곡이 넘는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노래방 반주기에 수록된 곡이 가장 많은 가수다.

 

나훈아는 히트곡의 숫자에서도 국내 최다는 물론이고, 앨범 발표수만 해도 무려 200장 이상, 800곡 이상의 자작곡을 포함해서 2600곡 정도의 취입곡을 자랑한다. 이처럼 나훈아는 트로트의 황제, 가황(歌皇)이라는 별명이 정말 잘 어울리는 가수다.

 

1966년에 '천리길'을 발표하며 데뷔하였다는데 데뷔년도를 빨리 올리기 위한 이야기로 추정된다. 실물 음반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가장 오래된 실물 레코딩 노래는 1968816일 내 사랑이 확인된다. 천리길은 1969529일 발표되었다. 2020KBS에서 진행한 콘서트 준비를 하며 본인이 데뷔 54년 가수 생활이라고 언급 한 것을 보아 본인은 1966년 데뷔를 확실시 하는 듯.

 

1947년생으로 익히 알려져 있으나 어린 시절에 데뷔한 것으로 인해 험한 연예계에서 얕잡아 보일까봐 나이를 올린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1947년생이 아니라고 한다. 남진도 조용필을 통해 나훈아의 나이를 전해들은 바를 이야기 한 적이 있으며 1960~1970년대 LP들에서 나이를 소개할 때 1950, 1951년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남진의 해당 발언이 담긴 최일구의 허리케인 라디오에 달린 나이 관련 내용을 조사한 댓글이 있다. 아래는 해당 댓글과 관련 증언들을 언급 기사들과 함께 정리한 것.

 

"호적상에는 1951년생임. 그러면 호적이 4년이나 늦게 올려져 있다는 얘기인데 본인과 가족들 만이 진실을 알고 있겠지요. '53년 생이고 부산 출신이며 지금까지 부산에 살고 있는 저는 초량 초등, 부산 대동중 출신 친구들이 몇명 있는데 그 들은 우리 두해 선배로 기억 하더군요.

 

나훈아가 대동중학교 시절 야구를 했는데 청소년 야구대표팀 감독과 포철공고, 서울고 야구팀 감독을 역임한 유태중(대동중 18, 19672월 졸업)과 동기였다고 하며 허구연 야구 해설위원(1951년생, 경남중 241967년 졸업)'MBC FM4U 두시의 데이트, 박경림입니다'(2013.12.27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중학교 때 나훈아가 야구선수로 뛰었다. 나는 부산 경남중학교, 나훈아는 부산 대동중학교에서 선수생활을 했다"면서 장기자랑을 할 때 노래를 정말 잘 불렀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중학교 선배인 이희수 감독 (1948년생) 역시 나훈아가 그 당시 빼어난 실력을 가진 내야수였다고 기억을 한다. 2001년 매일경제 기사에도 언급된다.

 

서라벌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호랑이 그림 화가로 유명한 서양화가 이목일 (1951년생, 서라벌고 131970년 졸업) 화백은 '그 시절부터 이미 노래 하나는 끝내줬던 인물'로 기억한다. “1학년 때 우이동 골짜기로 봄소풍을 갔었어요. 그때 홍기(나훈아의 본명)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불렀는데 함께 소풍 왔던 이웃 동덕여고생들까지 환호성을 질러 골짜기가 온통 함성으로 뒤덮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결국 이후 가수로 데뷔한 이 자랑스러운 홍기를 위해 친구들이 너도나도 엽서를 사서 방송국에 신청곡을 보내던 기억이 새롭습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다만 당시에는 영아사망률이 워낙에 높아 죽지 않고 2~3년 크는 거 보고나서 호적에 올리는 일도 흔해서 당장 부모님 세대에는 실제 나이와 호적 나이가 다른 사람이 드물지 않다. 입학통지서도 당연히 호적에 등록한 날짜를 기준으로 오며, 학원스포츠에서는 나이도 굉장히 중요한데 결과적으로 프로가 되지 못한 나훈아가 빼어난 유격수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나이 빨도 있었으리란 추측도 가능하다.

 

그냥 일반인 증언도 아니고 허구연, 이목일 등의 같은 시절 중학교를 다닌 사람, 고등학교 동창 그것도 같은 반 친구되는 양반들의 직접적인 증언과 조용필 등의 발언을 종합할 때 1951년생 말고는 달리 언급 할 방도가 없다. 특히 이희수 감독이 1948년생인데 도저히 1947년생이 맞을 수가 없다. 1945년생[11]인 남진과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 나훈아를 47년생까지는 끌어올리지 않았겠느냐 하는 설이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여러가지 정황상 그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해방 직후,한국전쟁이라는 극한 시대상황이어서 영아사망률이 워낙에 높아 죽지 않고 2~3년 크는 거 보고나서 호적에 올리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나이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것이다.